시간은 기억의 수레를 끌고-배기환 시집
도시의 매너리즘
배기환
각양 각색의 자동차를 사육하고 있는 거대한 이 도시의 거리로 나서면 봄 햇살 같은 열정을 묻어둔 채 지리멸렬한 시간을 갉아먹는 초침 소리가 요란하다
삶의 덫에 걸린 행인들이 비밀번호를 입력시키며 무표정하게 걷고 있는 횡단보도가 나를 뛰어 건너고 18층 건물에서 번지점프를 하는 바람 속엔 살을 익혀버릴 듯한 따가운 햇살이 눈을 부릅뜨며 카오스를 물어 뜯어버릴 것이라고 잔뜩 벼르는 것 같다
내비게이션 속의 가변차선 안으로 빨간색 에스 유 브이 자동차 한 대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가속 페달을 힘껏 밟기 시작하였다
하늘에는 격납고를 막 벗어난 항공기 한 대가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비실비실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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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서서히 기억의 수레를 끌고 가파른 언덕길을 오른다
과속방지턱을 겨우 넘어선 내 우주선 솔롱고스호*는 지금 광대무변한 블랙홀의 난간이 열리기를 기대하며 시동을 걸지만 시야가 그렇게 밝지 못하다
소란스럽던 바람이 우주의 문을 활짝 연다
우주 속에 펼쳐진 사막에서 낙타가
지평선을 물고 달려온다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아무래도 세상일들이 석연치가 않다
영혼과 영혼끼리 친숙하게 교미하여
수정된 광입자가 은밀하게 숨어서
지평선을 바라본다
가장 튼튼하고 건강한 지구와 가장 아름다운 별들을
사주하여 또 다른 우주 하나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우주 때문에 거대한 지진과 쓰나미를 동반한 천지개벽이 도래해 올지도 모르면서,
*필자의 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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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겨울이 되면 박제된 밍크의 울음소리를
목에 두르고 다니는 그녀에게서
짙은 화장품 향기 대신
지독한 부르주아의 냄새가 난다
어쩌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그녀의 얼굴에서 편집되는 표정 속엔
사바나의 치타에게 쫓기며 도망 다니는
불안한 영양의 표정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는데
어디를 훑어봐도 전기나 도시가스, 음식물 쓰레기 따위와
깊은 우정을 나누며 세상을 세탁하고 수선하고
다림질하며 살아가는 여느 여인네들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멀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데
하얀 푸들 한 마리가 그가 부양하고 있는
유일한 가족이라고 알려진 그는 코로나로
흑백 마스크가 패션이 되어버린 지금도 마스크 대신
짙은 선글라스 속에 얼굴을 감추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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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빨간 마음의 층계를 걷는 발걸음 소리가 난다
따뜻한 햇살이 몹시 그리웠던 담장 위에도 파란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툭 건드리면 터져버릴 것만 같은 눈부신 햇살에 곱게 익은 너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 죄 때문에 몸 여기저기 뾰족한 가시가 돋아나는 것이야
바람이 햇살을 한 입 베어 물고 사라지기 전에 너는 세상을 온통 마비시킬 향기를 제조해야 해
사랑은 가시가 박힐수록 단단하게 굳어지고 향기는 묵힐수록 멀리 날아간다 수정처럼 맑은 이슬 머금고 태어나 가시로 무장한 너는 말없이 던지는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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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어쩌다 사람들의 주검 앞에서
그들의 명복을 빌어주는 꽃이 되었을까
세상을 하직한 그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성실과 진실, 그리고 감사의 꽃말을 가진 그가
이제는 *봄부터 소쩍새가 울지 않아도
먹구름 속 천둥은 애달퍼 울지 않아도
간밤 무서리가 그렇게 내리지 않아도
사시사철 여기저기 우아하게 피어나
제단 앞에선 영령들의 명복을 빌고 떠나보내며
애도하는 이들에게는 슬픔을 닦아 주는
왜 그 꽃이 되었을까?
*이하 3행 서정주의 국화꽃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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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환 시인이 그의 아이디 솔롱고스호를 타고 새로운 우주를 창춘해낸 것은 우리 인간들의 삶의 터전인 이 지구가 너무나도 엄청나게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랑과 애정이 담긴 말보다는 더 이상 참고 들을 수 없는 거친 말과 가시 돋친 말들이 난무하고 눈앞의 이익을 두고 더 이상 눈 뜨고 볼 수 없는 사생결단식의 이전투구들이 벌어지고 지구는 점점 뜨거워지고, 수많은 생명들이 다 죽어가도록 오염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애정이 담긴 말과 듣기 좋은 말의 세계는 자연의 세계이며 너와 내가 손을 잡고 한 폭의 풍경화, 즉 아름다운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는 세계이다. 한 편의 시는 바다이고, 어머니이며 한 편의 시는 배기환 시인의 새로운 우주이다.
-반경환 '애지' 주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