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김미량 시집
미량
김미량
어떤 맛일까. 미량은
궁금해요 내 혀는 몸 어디에도 닿지 않으니
꽃밭에 누워 하품하는 나를 맛볼 수 없죠
설렘은 커다란 귀를 쫑긋 세우고
인기척에 놀란 벌떼와는 좀 다른 거겠죠
벌 같은 걸까요
내 몸엔 독성 미량이 함유되었으므로 조심하세요
주의사항은 늘 늦게 읽히죠
미량이어서
이마만 동그랗게 부풀었습니다
미량 보존의 법칙은 이마에도 유효합니까
입술이 누굴 환영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방금 누가 내 이름을 불렀습니까
미안, 트림이 나왔어요
하이, 박사님
머릿속이 흐린 날이 너무 많아요
극미량이라면서요
열 숟가락쯤 상상을 추가하면
여우처럼 보일까요
한 숟가락의 상상으로
얼마나 많은 늑대를 길렀는지는 말하지 않은
실험실에서의 하루
미량스럽다,는 말은 그쯤일 거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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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
꽃은 세상에 오기 전
작은 색종이였다
믿기지 않겠지만 저녁이면 신과 함께
형형색색 꽃을 접었다
말없이 동그란 탁자에 마주 앉아
보라색을 좋아하는 나를
맨 처음 제비꽃으로 접어주셨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신의 무릎에 앉을 수 있었다
(당신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군)
떠나오던 날
신은 분홍색 분꽃을 접어 손바닥에 올려주셨다
어른이 되어
누군가의 손바닥에 분꽃을 올려놓으면
그 사람은 겨울에 죽는단다
신의 부탁으로
사람들에게 꽃을 알리러 세상에 왔다
걸어오는 꽃은 고백처럼 잘 보이고
쓰러진 꽃들은 기도처럼 일어났다
목마른 꽃을 위해 빗소리를 틀어두었다
방향을 잃은 꽃들은 새로운 기억으로 더 붉어지고
어젯밤 꿈에
신의 무릎에 앉아 그날처럼 제비꽃 오백 장을 접었다
아무도 믿지 않는 전생은
믿거나 말거나 다 끝난 이야기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저녁에 잠든 꽃을 찾아갔다
너는 알고 있지?
그때 나는 주황색이었니 보라색이었니
그때 나는 살았니 죽었니
가까이하면 불행해진다는 분꽃을 잊고 살다가
가을에 나를 부르는 꽃이 수상해
당신에겐 그 꽃을 따다 주었다
신의 예언처럼 크리스마스에 죽은 사람
꽃과 나와
신의 거리가 분간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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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말 고쳐드립니다
안녕? 사장님,
당신 긴 혀 날름 끓여먹은 꽃뱀은 어디 있나요
캐비닛에 한 달째 부류 중인 토막말도
이제 그만 폐기하시죠
아랫배가 불룩한 당신의
거친 말들은 영양실조에 걸렸어요
도마뱀을 사랑하신다고요
밤마다 잘라먹은 꼬리가 많아서요?
그 입 좀 다물어요
비린내가 폴폴나요
퇴근길에 당신을 만났죠, 엘리베이터 안
문이 열리고
시침질하듯 치마 뒷자락을 들치는
당신의 반말, 됐고요 오늘 밤 꿈속으로 놀러 오세요
내 꿈은 병원 당신은 나의 환자
윙크 한 방이면 전신 마취 문제없어요
걱정 말아요 배의 지퍼를 열면
엊그제 회식 때 먹은 흑염소 울음
똬리를 틀었던 꽃뱀은 스르륵 도망가고요
불쌍한 도마뱀 꼬리도 있군요
푹 꺼진 뱃속에
장례식장에서 망자를 배웅하던 흰 국화를
잔뜩 쟁여놓았어요
마취가 풀리고
혹, 향기로운 존댓말이 입속에서 빠져나와도
놀라거나 반항하지 말아요
저승의 말은 극존칭이에요
재조립한 당신이 마음에 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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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미량
돌을 던진다 하나, 둘, 셋, 던진 돌에 번진 파문들이 돌에 되돌아오다 파문을 만나 서로를 건넌다 나는 당신이 어디서 나와 마주쳤는지 어디서 나를 건넜는지 알지 못한다 돌의 부피만큼 불어난 호수의 물은 어디로 갔을까 기슭에 오래 앉아 있었고 어둠이 내렸다
호수와 내가, 어둠과 내가, 당신과 내가 없다 해도 아침이 올 것이다 호수와 무관한 내 눈이 조금 넘쳤던 것 같았다 돌은 내 가슴에 떨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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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량에게 시는 삶이 가진 필연적 결핍을 적극 옹호하는 '나의 편'이다. 그가 현실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악착같이 시와 연을 맺어온 까닭일 것이다.
따라서 시집 전편을 통해 줄곧 시인이 되묻는 함의를 포함한 미량은 자신에 대한 질책과 삶의 여정, 다정한 다독임을 동반한다. 내적 울음이 함께할 것이 틀림없을 이 과정들은, 그러나 담담하고 자조적이며 때로는 명랑하다. 꿈의 영역이기도 하기에 솟구치고 추락하지만 끝내 다시 미량이라는 추임새와 함께 날갯짓을 예비하기도 한다. 스스로에게 내리는 축원 때문에라도 시인은 마술사가 되고 '스님, 책임져요'에서 보듯 손끝에서 꽃을 피우는 내일의 마술에도 가 닿는다. 오래 생활과 싸우며 쌓아올린 시집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 는 새로운 미래를 향한 날갯짓이 될 것이 분명하다. 다함께 독자가 되어 김미량이 꺼내올 미래를 기다려보기로 하자.
-임재정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