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 29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신진 시집

시소 신 진 두세 살배기 애 둘이 시소 놀이를 하고 있다 하나가 내려가면 다른 하나가 올라가고 다른 하나가 내려가면 하나가 올라가고 하나와 다른 하나가 수평에서 만나는 순간 반가움에 까르륵 함께 전율한다 가장 황홀한 자세는 하나와 다른 하나가 평형으로 만나는 데 있나 보다 상대를 올리고 나를 내릴 때 평형에서 만난다는 이치 아가들끼리 아는 시소의 엑스터시 나도 같이 해볼까? 어른이 끼어들자 안 돼요! 이구동성 손사래 치며 울상을 한다 아가들이 아는 모양이다 일단 몸을 불린 인간은 사람 반가운 줄 모르고 평행장애로 하여 수평잡기를 못한다는 사실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자아실현 내 집 지키고자 남의 집을 턴다 남의 집 터는 동안 내 집 털린다 남의 집 터는 궁리를 지혜라 하고 내 집 털리는 짓을 양심이..

카테고리 없음 2024.11.09

보고 싶다는 말은 아주 먼 곳에서 오는 말이다-최성규 시집

반생이* 묶는 법 최성규 어깨를 꽁꽁 묶어주세요 삐거덕 흔들거리지 않게 단단히 고정해주세요 질끈 살았던 날들이 어긋나 풀어지지 않게 버텨 온 날들이 와르르 무너지지 않게 차근차근 매듭을 다시 꿰매듯 말이에요 남아 있는 날들까지 지탱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요 실손보험이 가능하다면 좀 더 질긴 철끈이면 좋겠습니다 엇갈린 반골들의 마디 마디를 잡아당겨 어제보다 좀 더 조여 묶다 보면 기울어진 그림자도 고정될 수 있겠죠 고통은 끌어당겼을 때 단단해지는 법 느슨해진 날갯죽지를 통증의 쾌감이야말로 시원한 파스 냄새보다 강력한 확실히 견고해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연질 철사로 공사 현장에서 철근을 고정할 때 쓰는 용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잘못 뽑았다 2023년 7월 19일 해병대원 순직 사건 청문회를 시작했다..

카테고리 없음 2024.11.08

거푸집의 국적-황정산 시집

반타 블랙 황정산 튜브를 건너지 못하는 파동이거나 입자이거나 구김이 없으니 얼굴이 없다 빛난 적 없으니 색깔도 없다 동사로 존재했을 이름은 움직임을 잃고 부사로 남고 부끄러운 서명은 지워지고 두려운 음각의 흔적마다 사라졌다 옐로우는 마젠타와 함께 잘 구운 살갗을 만들고 시인은 옐로우와 섞여 휴식을 가장하지만 짜장면이 자장을 지우지 못하듯 잉여가 잉여를 없애지 못하고 이름은 이름을 대신하지 못한다 구멍이 구멍이 아니어도 모래는 모래가 아닌 모래가 하나도 없다 바람이 호명하고 풀잎이 지명하는 완벽한 블랙리스트 우리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바지랑대의 하루 젖은 것들을 붙잡고도 슬프지 않았다 외줄 위에는 쉬이 이슬도 말랐다 죽은 아이의 머리칼을 물고 물길을 헤집어도 노엽지 않았다 물속에 길은 없었다 날개 가..

카테고리 없음 2024.11.07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이송희 시집

배꼽의 둘레 이송희 내 울음의 뿌리가 어디인지 알았지 지하 방은 좁고 깊어 무엇도 닿지 않아 그림 속 낡은 둘레가 깃발처럼 펄럭인다 색이 번진 표정은 도무지 알 수 없어 맨 먼저 닿은 언어를 빵 속에 섞는다 거울엔 조각난 내가 맞춰지는 중이야 중심이 된다는 건 외로운 일이지 왜 나는 흩어지면서 내면을 겉도는 걸까 모르는 울음의 거처를 내게 다시 묻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비의 감정 당신은 무식하게 폭언을 쏟아낸다 말 한마디 건넬 틈 없이 문 앞에 붙인 독촉장처럼 언제나 사선으로만 뒤통수를 내리친다 송두리째 쓸고 갈 듯 밀려오는 소리들 기다란 벽에 붙여 당신을 피해 다닌다 금 간 벽 틈새로 들어오는 매서운 통보들 수장한 꿈들은 어디로 쓸려 가는지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유서가 떠돈다 오가던 길이 잘린..

카테고리 없음 2024.11.06

다시 박인환문학관에서

다시 박인환문학관에 들렀다 비원문학회와 달빛문학회 합동으로 진행하는 가을 문학기행으로 인제를 다녀왔다 박인환 시인의 흔적을 따라 가며, 그 시절의 시인의 옷자락을 매만지느라 감상에 젖기도 하고 시인의 사진과 육필 원고를 보고 그가 들렀던 자리에 머무르며 그리움을 삼켰다 점심은 근처에 있는 인제막국수 집에서 막국수와 수육, 옹심이와 막걸리로 산촌의 향기를 맡았다

카테고리 없음 2024.11.05

박건호 기념 공원에서

연변시인협회 김학송 회장님과 함께 박건호 기념 공원을 둘러 보았다. 원주시 무실동에 위치한 박건호 기념 공원은 시인이자 작사가로 수많은 히트곡을 유행시킨 그의 흔적을 더듬으며 당대의 가수들을 떠올리는 특별한 시간이 되었다. 수석을 좋아하는 김학송 회장님의 취미 덕분에 연변에서 직접 가지고 오신 소품 두 점을 선물로 받았다. 가을이 깊어가는 시간, 산이 시를 쓰고 있다.

카테고리 없음 2024.11.03

꿈나라 아이들-엄순영 동시집

아침 교실 엄순영 아무도 오지 않는 텅 빈 교실에 먼저 온 아침 해가 혼자 놀다가 책을 펴 논 내 책상 가방 놓인 빈 의자 구석진 마루까지 몰래 쓸고 갑니다 늦게 온 철수는 문밖에서 기웃대다 열어 논 뒷문으로 살금살금 기어들어 아침공부 혼자 풀면서 쩔쩔매고 있습니다 "철수야 어서 나와 줄넘기하고 놀자" 바람타고 들려오는 아이들의 노래에 슬며시 뒤돌아보니 선생님도 빙그레 웃고 계셨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꿈나라 아이들 꿈같은 지난날이 그리워질 땐 눈감아도 새록새록 떠오르는 해맑은 꿈나라 아이들 무시로 보고파지는 얼굴 하나 둘 그리다보면 어느새 내 맘속엔 꿈나라 아이들이 몰려들어 재잘재잘 속삭이고 나도 따라 저절로 꿈나라 아이가 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선생님 앞에 서면 선생님 앞에 서면 내 ..

카테고리 없음 2024.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