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제비꽃
주경림
산제비나비, 꿀벌 친구들, 어서 놀러 오렴
꽃잎 뒤쪽에 볼록하게 꿀샘을 채워 놓았으니,
울진, 산불이 휩쓴 자리에 노란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네
봄이면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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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결벽증
정복선
거의 놀림을 받아 왔었다, 드디어
나의 결벽증을 모두 따라하니
웃어야 하나?
물을 두세 배 더 쓰게 되었다고들 말한다
게다가 손 소독제와 물티슈로
휴대폰, 손잡이, 눈에 띄는 물건들을 의심하고 의심한다
입은 옷들, 신발들도 햇살에 널어 둔다
한번 결벽증에 중독되면 지문이 남아나겠나
왜, 앙코르와트 근처에서 몇 달씩 세 들어 살며
자전거 타고 유유悠悠하던 이방인들이 생각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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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노래
이혜선
일찍이 나는 순백의 맨발
우주의 아이였지요
비취의 하늘밭을 뛰어다녔어요
하늘 자궁에서 자라나 어머니의 궁전으로
티 없는 이 땅에 별이 되었지요
오늘도 비취의 하늘땅을 바라
죄 없는 사랑을 노래한답니다
이 땅의 사람들을, 나무와 풀잎과 바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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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꽃은
이창호
저 꽃은
부처님의 미소일레
이 욕심 세상에
한번 웃어 보라 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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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초
이영신
서대산 지나 울울산 베티재 넘어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지축을 흔들며 한 구둣발이
쌀알만 한 바퀴벌레의 등을 덮치는 순간
저승 명부엔 붉은 붓으로
사선 한 줄이 그어지고
한 바퀴벌레의
삼천대천세계가 찰나에 바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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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봉이
윤정구
자하산 골짜기 구슬봉이
남몰래 피어서 애기 벌을 기다린다
눈 녹아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사이로
부웅부웅 애기 벌 소리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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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꽃
유소정
한두 방울 후드득,
길을 내면 그 길을 따라
하늘에서 땅으로 가랑비 자드락비
이내, 흔적이 잊힌 마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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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
석연경
가시 옷 벗은 뜨거운 밤을 안고
젖을 물리는 나무들과 바람 부는 성벽을 걷자
어머니가 둥근 배를 몰고 가는 집
모과나무에는 잘 익은 적막의 향기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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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김현지
애초부터 타는 입술 스스로 적실 줄만 알았어도
엄동에 시린 얼굴 붉히지만 말고
다소곳이 눈 감고 봄, 기다렸으면
입술 오므린 채 생각, 생각만 하지 말고
시시로 타는 숨길 후, 후, 눈밭에 뿌렀더라면
그랬더라면
한순간에 뚝, 뚝, 허망하게
저리 허망하게 목숨 놓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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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있는 한 그것이 소멸하는 순간까지 언어를 고양하는 작업이 글을 쓰는 일이다. 오직 언어로 이어 가는 문학 수행을 어느 시대의 언어로 하느냐는 질문에서부터 현대향가의 정체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현대향가는 이 시대의 언어로, 당대인의 정신 내용을 불교 수행자의 자의식으로 쓰는 것이다.
현대향가가 계승하는 것이 물성보다 정신의 문제라는 것은 현대향가 제5집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어떤 시편을 읽더라도 향가 정신이 흐르고 현대인이 숭앙하는 물적 가치는 대체로 여기에 없다.
중단이나 단절이 아닌 계승 또는 연속성이라는 개념으로 현대향가를 말할 때 향가시회 동인들의 문학 수행은 당연히 전통향가의 형식과 내용을 이어 받아 변용과 다시쓰기로 이 시대 불교정신의 연속성을 구현하는 것이다.
-김효숙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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