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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한 강 시집

김남권 2024. 11. 25. 08:10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한 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눈물이 차오를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거리 한가운데서 얼굴을 가리고 울어보았지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선 채로 기다렸어. 그득 차오르기를

모르겠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갔는지
거리 거리, 골목 골목으로 흘러갔는지

누군가 내 몸을 두드렸다면 놀랐을 거야
누군가 귀 기울였다면 놀랐을 거야
검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
깊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
둥글게
더 둥글게
파문이 번졌을 테니까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알 수 없었어. 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니

거리 한가운데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
그렇게 영원히 죽었어. 내 가슴에서 당신은

거리 한가운데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
그렇게 다시 깨어났어. 내 가슴에서 생명은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천오년 오월 삼십일, 제주의 봄바다는 햇빛이 반, 물고기 비늘 같은 바람은 소금기를 힘차게 내 몸에 끼얹으며, 이제부터 네 삶은 덤이라고

어린 새가 날아가는 걸 보았다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조용한 날들

아프다가

담 밑에서
하얀 돌을 보았다

오래 때가 묻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

아무리 들여다봐도
마주 보는 눈이 없다

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
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무엇에게도

아프다가

돌아오다가

지워지는 길 위에
쪼그려 앉았다가

손을 뻗지 않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회복기의 노래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전철 4호선,
선바위역과 남태령역 사이에
전력 공급이 끊어지는 구간이 있다
숫자를 세어 시간을 재보았다
십이 초나 십삼 초,
그사이 객실 천장의 조명은 꺼지고
낮은 조도의 등들이 드문드문
비상전력으로 밝혀진다
책을 계속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워
나는 고개를 든다
맞은편에 웅크려 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파리해 보인다
기대지 말라는 표지가 붙은 문에 기대선 청년은 위태로워 보인다
어둡다
우리가 이렇게 어두웠었나
덜컹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
맹렬했던 전철의 속력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가속도만으로 레일 위를 미끄러지고 있다
확연히 느려졌다고 느낀 순간,
일제히 조명이 들어온다, 다시 맹렬하게 덜컹거린다, 갑자기 누구도 파리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나는 건너온 것일까?
-표4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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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그림의 실재가 궁금했던 사람들은 이제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를 펼치면 된다.
-조연정 문학평론가